도종환 <사랑은 누구나 꽃이다> 한 개의 과일이 결실을 이루기까지 비바람에 시달리는 날들도 많았지만, 그 비와 바람과 햇빛을 받으며 익어온 날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꽃 한 송이도 지치고 힘든 날들이 많았지만, 그 하루하루가 쌓여 아름다운 꽃을 피운 것이다. 사과나무도 밤나무도 그렇게 가을까지 온 것이며, 과꽃도 들국화도 코스모스도 다 그렇게 꽃 핀 것이다. 바람과 햇빛이 그런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힘을 준 것들도 많은 것이다. 살에 와 닿는 바람 한 줄기도 고맙게 느껴지는 가을이다. --- p. 60
밤마다 우리를 지켜주던 별이 오늘도 내 머리 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 든든하다. 내가 별을 올려다보는 이 각도의 반대편 꼭짓점에 그대가 있을 것임을 나는 안다. 그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별은 우리를 그렇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연결해주고 있을 것이다. --- p. 81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마음을 겨울 동강처럼 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빈 마음의 옆자리에 겨울나무 한 그루씩 간직하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이어도 좋다. 모두들 가슴속에 나무 한 그루씩을 심고 가꾼다면 얼마나 여유로울까. 그 나무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파란 싹이 돋고, 한 해에 한두 번 꽃이 피고 잎이 지는 걸 편안히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힘들고 지칠 때면 그 나무에게로 달려가 하소연하고, 그 나무둥치에 편안히 등을 기대어 쉴 수 있다면 말이다. --- p. 118
그러나 나는 거기까지만 생각했지 칼이나 낫을 예리하게 벼리어주는 동안 숫돌도 조금씩 닳아 없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쇠를 그냥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는 요술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제 몸도 닳아 없어지면서 칼날을 세워주는 것이었다. 무딘 연장을 날카롭게 바꾸어주는, 쇠보다 단단해 보이는 숫돌도 보이지 않게 제 몸이 깎여져 나가는 아픔을 견디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 p. 135
낯모르는 이웃의 병상에 찾아와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철학과 내 과학과 내 문학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일면식도 없는 이웃 아낙을 찾아와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해달라고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고통받는 내 이웃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아파하는 모습으로 문학을 해왔던가 하는 반성을 했다. --- p. 148
삶의 속도에서 내려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게 휴식이나 여행일 수도 있고, 기도일 수도 있고, 달리기일 수도 있고, 명상 수련에 참가하는 것이거나 삼림욕일 수도 있다. 뉴에이지 음악을 듣는 것도 방법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의 하나이다. 고요한 시간 속에 자기를 놓아두어야 한다. 그게 몇 시간이어도 좋고 며칠, 아니 때론 몇 년일 수도 있다. 그건 현실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다. 달아나는 것이라기보다 삶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한 과정이다. --- 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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